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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산호세 산타클라라교회 홈목사님이 연구한 인터콥과 최바울
작성자
제3자의입장에서쓴글
작성일
2011-04-12
조회
2572

최근에 미주한인 교계에서 인터콥과 최바울 대표에 대한 논란이 표면화되었다. 한국에서는 이미 수년전부터 최 바울 대표가 지향하는 방향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어서 한국에서의 활동이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고, 그 대신 활동의 중심추가 점점 한국에서 미국으로 옮아와 인터콥이 미국 내의 많은 곳에 지부를 두고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난 2월 16일 미국 내 한인 목회자와 신학자 110인이 최바울 대표의 이단성을 지적하며 각 교단과 단체에서 이것을 확인해줄 것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내기에 이르렀다. 미국에서도 이미 최바울 대표와 인터콥이 지향하는 방향이 정통 교회가 지향하는 것과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그 후 2월 28일에 최바울 대표를 아끼는 어느 목사님의 중재로 미 동부 이단대책위원회장과의 모임에서 최대표는 자신에 대한 성명서의 내용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그곳에서 지적된 사항들을 수정하겠다고 약속했고, 한국으로 돌아간 후 3월 15일에 교계 지도자와 신학자들로부터 지도와 재교육 받겠다는 공식 사과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다.

직간접으로 인터콥과 비전스쿨에 관계된 분들이 미주지역에 많이 있는 상황에서 갑작스레 교계신문들을 통해 이런 소식을 접해서 혼란스러워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무엇이 올바른 신학이고 어떤 것이 올바른 선교관인지를 알려드리기 위해 이 글을 준비했다.

1. 최선교사의 “하나님의 사정”과 김기동의 “하나님의 의도”

최선교사는 인류의 역사를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의 장으로 본다. 사람을 꼭두각시처럼 생각해서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거나 마귀가 있다고 믿는다. 이런 영적 전쟁은 아담이 창조될 때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그래서 에덴동산이나 아담은 자연히 영적전쟁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런 이론 하에 최선교사는 [세계 영적도해]에서 “하나님의 사정”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 하늘에는 하나님의 사정이 있었다. 이 사정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고 이 사정 때문에 사탄이 하와에게 접근할 때 하나님은 그냥 보고만 계셨던 것이다.(35)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사단을 정죄하셨으며, 마침내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정죄된 사단의 정사와 권세를 꺾으셨습니다.”(46)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는 사탄과의 싸움에 수단으로 (최선교사의 표현으로는 동역자로) 사용하기 위해서이고, 이것이 곧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가장 중요한 존재목적은 사탄을 대적하는데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아담을 어떻게 사탄을 대적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나? 우선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가 범죄하는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지켜보고만 계셨다. 왜? 건수를 잡아서 사탄을 영원히 저주하길 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미 사탄이 인간을 타락시킬 것을 알고 계셨고, 그래서 건수가 터지기를 기다리고 계시던 차에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드디어 성취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에게 물었다. “네가 벗은 것을 누가 알게 했느냐?” 하나님은 아담에게 배후를 지목하여 입술로 고백하라고 추궁하시는 것이다. 사탄을 고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이 사탄이 범죄했다는 증거를 잡아서 “합법적으로” 그를 처벌할 수 있기 때문이다.(37)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사단을 고소하였고, 하나님은 합법적으로 사단을 정죄하신 것”이다.(39) 이렇게 모르는 상황에서나마 하나님의 작전에 사용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동역을 한 대가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구원의 방법을 제시해주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39)

여기에 심각한 신학적인 문제가 드러난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는데, 그 의미가 바로 이것이란 말인가? 하나님이 건수를 잡아 사단을 잡아넣는데 일조하도록 아담을 창조하셨다는 말인가? 이건 성경에 전혀 나오지 않는 이야기인데, 어떻게 최선교사는 이런 하나님의 속사정을 아는 것일까? 여기에 최선교사의 이단성이 있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사정”은 김기동의 “하나님의 의도”와 상당히 유사하다. 베뢰아의 김기동은 “인간은 하나님의 일에, 곧 마귀의 일을 멸하는 도구로 쓰임받았다”고 주장하는데, 최선교사는 이것을 한층 더 발전시킨 것이다. [크리스찬투데이] 2010년 12월 22일자(http://www.christiantoday.us/sub_read.html?uid=18169§ion=section58§ion2=2) 김한길 목사의 인용구를 재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한국침례회 보고서(1994. 7월호)는 ‘88년 기독교한국침례회총회(총회장 유광석 목사)’에서 발표한 자료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베뢰아 김기동 목사의 하나님의 인간창조목적은 다음과 같다. 인간 창조의 목적은 타락한 마귀를 멸망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하며, 그는 세상을, 하나님이 사단을 형벌하려고 만든 장소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의 의도 p.29; 신앙문답정신 p.8; 마귀론 p.4)

첫째, 죄짓고 오는 인간에게 상까지 주시겠다는 것은, 인간은 마귀를 멸하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위한 사전의 안내자였기 때문입니다.(마귀론 74페이지)

둘째, 인간은 사단을 정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 인간은 그가 오실 길을 위해 봉사한 것입니다.(마귀론 p.74 )”

“전 성락교회 부목사 이대규씨는 김기동 목사의 인간창조 목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김기동은 결국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목적은 마귀를 멸하기 위하여 만든 도구에 불과한 것이며 사람은 결국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있던 천사의 형상을 따라 지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말하기를, 성경에서 우리는 인간의 구원을 배우지 말고 하나님의 의도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인간 구원만 생각한다면 마치 돼지가 자기를 먹여주는 주인 아주머니를 식모로 생각하고 거름을 치워주는 주인을 머슴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라고 말한다. 아담을 꾀어 사망을 가져오게 했으니 바로 사망 권세자로 합법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귀를 합법화시킨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그를 합법적으로 심판하고 형벌하기 위한 것이기 위함이라고 한다.

김기동 목사는 신의 하늘에서의 범죄는 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죄로 여길 수 없었지만 사탄을 음부에 가두어 놓은 후에 인간과 선악과를 만들어 세워 놓은 후 사탄이 마각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사탄을 잡은 유도 장치와 같은 이치로써 사탄을 정죄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선악과를 만들었다고 한다.”

최선교사의 “하나님의 사정”과 김기동의 “하나님의 의도”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내용을 마치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인 것처럼 설명하는 근거없는 주장인데, 그들은 왜 이런 없는 내용을 만들어서 가르치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 사탄에 대항하여 싸우는데 있다고 몰고 가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 과업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곳이 선교현장이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동원하기 위해서이다. 이 세상에는 사람들끼리 서로 경쟁하고 싸우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배후에 하나님과 사탄이 사람을 매개로 대리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영적 구도를 깨닫고 하나님 편에서 사탄을 대적하는 전사로 사용될 때, 인간은 원래의 창조된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선교는 이런 사탄을 대적하는 존재목적을 가장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사정은 최선교사가 지향하는 선교의 기본 틀이자 동력원이 되는 것이다.

2. 땅 밟기

얼마 전에 기독교 청년들이 봉은사에 들어가서 땅밟기를 하며 기도를 하고 그걸 동영상으로 찍어 인터넷에 올려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최선교사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유의 행동을 성서적인 것으로 보고 우상이 지배하는 곳에 가서 이렇게 하면 악한 영이 제압당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것은 성서에 근거가 없는 터무니없는 사상이다. 물론 이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리고성을 도는 것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땅밟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일 진짜 땅밟기가 성서적이고 실제로 그렇게 효력이 있는 것이라면,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이 사람들이 땅을 밟으며 기도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이런 해석을 지지할 수는 없다.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이고,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여리고성을 돌았기 때문이지, 그들이 땅을 밟으며 기도를 함으로 악한 영이 제압당해서 성이 무너진 것은 아닌 것이다.

악한 영이 지배하는 곳에 가서 직접 땅을 밟고 기도하면 악령이 제압된다는 생각은 무당들이나 하는 주술이다. 이런 식으로 기도해야 하나님이 역사하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독교를 무당종교로 만드는 사람이다.

땅밟기는 어느 지역의 영적인 상황을 분석하여 영적지도를 작성하는 영적도해(spiritual mapping)에 기초하는 것인데, 피터 와그너를 위시한 신사도운동(New Apostolic Reformation) 지지자들이 이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 이론에 의하면 “사도들”이 어느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그곳의 영적지도를 작성하고, 이 지도에 기초하여 그중 악한 영이 가장 강한 곳에 침투해 들어가서 그곳에서 땅밟기를 하며 기도를 하면 악령이 제어되고, 이렇게 중심부를 장악하게 되면 그 지역 전체를 장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최선교사가 쓴 [세계영적도해](Global Spiritual Mapping)가 바로 이 사상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터콥이 그렇게 힘들여 회교권 도시에 단기선교팀들을 보내서 땅을 밟으며 기도해야 하는 이유이며, 현지 선교사들과 교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회교권 국가에 들어가서 대규모로 기도집회를 열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지에 가서 땅을 밟고 기도를 해야 악한 영이 가장 효과적으로 제압당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성서적일까? 성경과는 반대되는 샤머니즘적인 발상이다. 어디 성경에 이방신전이나 우상이 있는 중심지역에 가서 땅을 밟으면서 기도하면 그 지역을 점령하는 악한 영이 물러간다고 되어 있는가? 성경에 어디 그런 예가 있는가? 이는 중세의 퇴마행위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어느 특정한 행위를 함으로써 원하는 마법효과를 얻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악령이 있는 곳에 성수를 뿌린다든가, 집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귀신을 좇아내는 기도를 한다든가 하면 악령이 물러간다는 식이다.

3. 잘못된 성서해석

최선교사는 자신의 책 [시대의 표적]에서 잘못된 성서해석, 특별히 종말에 대한 잘못된 성서해석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단들은 물론이고 복음주의 설교자들을 포함해서 의외로 많은 사역자들”이 실수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지상명령과 주님의 분명한 공개적인 가르침은 등한시하고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에는 주목하지 않고, 성경 한 구절에 집착하며 그 구절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37) 올바른 지적이다.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을 무시하고 그것과는 상관없이 자기 맘대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 이것이 이단의 특징인 것이다. 그런데 최선교사 자신이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교리화해서 선교단체를 이끌고 있다.

가장 심각한 예를 두 가지 들면, 계시록 17:1절에 나오는 음녀(“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에 대한 해석과 이사야 49:12절을 기초로 Back To Jerusalem 신학을 구성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먼저 음녀에 대한 해석을 살펴보자. 최선교사는 상상소설 수준의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그의 책 [세계 영적도해]에서 음녀를 가리켜 자본주의/자유주의 문명 혹은 세계통합세력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긴 문장을 직접 인용하는데 이것이 얼마나 성경에 기초하고 있는지 독자들이 직접 살펴보시기 바란다.

“이 여신[음녀]은 본래 고대 바벨론의 신이었다가 에게해 신으로 변신하여 서방 세계에 등장했습니다. 이 신은 여신으로서 에게해에서는 Sibela 신으로 불리웠습니다. 시벨라 여신은 자유와 풍요의 신입니다. 이후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이르러서는 Artemis 여신으로 다시 변신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와 헬레니즘 세계를 지배해 왔습니다. 아르테미스 여신 역시 자유와 풍요의 여신입니다. 이후 로마제국 시대에는 Diana 여신으로 변신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 이후 다이아나 여신은 기독교에 침투하기 위해 ‘마리아’ 여신으로 변장합니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중세 기독교에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퇴출되는 듯했는데 프랑스 혁명 이후 또다시 부활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그 정체를 드러냅니다. 자유의 여신! 이 자유의 여신은 프랑스 혁명 이후에 미국으로 넘어갑니다. 1886년 프랑스는 미국에게 자유의 여신을 넘겨주었고... 이후 미국은 자유의 여신을 숭배하는 나라로 급속히 변해갔습니다.”(201-2)

최선교사는 어떤 근거를 가지고 위의 여러 여신의 형태들이 계시록에 나오는 음녀가 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그가 제시하는 성경구절은 둘이다. 첫째는 계시록 17:5절에 보면 이 음녀의 이마에 “큰 바벨론”이라고 씌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바벨론과 자본주의 문명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바벨론은 당시 세계문명의 중심이기 때문에 이것이 곧 자본주의와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문명=자본축적과 운영) 바벨론이 문명의 중심이고 바벨론이란 글자가 음녀의 이마에 새겨져 있으니 음녀는 자본주의 문명을 의미하고, 자동적으로 그 후 세계를 재패한 최강의 문명국들은 음녀가 되는 것이고, 그런 맥락에서 미국도 현대판 음녀가 되는 것이다. 대단한 상상력이다. 성경구절 하나를 떼어서 소설을 쓰고 있다.

최선교사가 드는 두 번째 성경구절은 1절에 나와 있는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라는 표현이다. 많은 물가에 있으면서 당시 최강의 문명국들은 어떤 나라들일까? 이집트, 바벨론, 그리스, 로마,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이다. 그리고 이 음녀는 당연히 여자이니까 이들 나라가 섬기는 여신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최선교사는 이 두 가지 요소를 결합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물가에 있는 문명국들 중 대표적으로 그리스를 들 수 있는데, 그리스는 에게해와 지중해를 끼고 있다. 역사를 더 거슬러 위로 올라가서 보면, 지중해에서 이집트 문명을 형성한 여신인 Isis 여신이 있다. 이 이시스가 나중에 바벨론의 “니느웨의 여신”으로 갈아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집트가 쇠퇴하고 앗시리아가 강대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요시아 시대에는 아세라 여신으로 변신하고, 그 다음에는 마리아 여신으로 갈아타고, 그 다음에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그 다음에는 프랑스혁명의 자유의 여신, 그 다음에는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으로 갈아탄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식으로 어느 세대에나 음녀가 있는데 이 음녀는 당대의 가장 힘이 센 나라를 지배하는 신이 되는 것이다.(203이하)

최선교사는 이렇게 계시록의 두 표현을 가지고 상상의 날개를 펴서 자기 멋대로 반문명, 반자본주의, 반자유주의, 반권위주의 신학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이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잘못된 신학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 몇 군데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신학체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최선교사의 잘못된 성서해석의 진가가 드러나는 곳이 그의 선교사상의 핵심인 Back To Jerusalem이다. 그의 책 [왕의 대로]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BTJ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마지막 선교운동이다. 복음은 항상 서쪽으로 전진을 하는데, 이제 말세가 되어서 복음이 중국에서 예루살렘으로 마지막 서진(西進)을 하게 되는 시점에서 한국은 중국과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모슬렘 국가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이 서진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복음으로 회복될 때 그때 종말이 오고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이다.(81, 256-7) 하나님의 선교의 종착점이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에 복음이 전해지면 그때 끝이 온다? 이런 말이 성경에 어디 있는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면 세계가 마감된다고 했지 어디 예루살렘에 복음이 전파되면 마감된다고 했는가?

최선교사는 어떤 성서적 근거에서 이런 주장을 펴는 것일까? 어이없게도 이사야서 49:12절에 나오는 “시님”이라는 단어가 전부이다.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 어떤 사람은 먼 곳에서, 어떤 사람은 북쪽과 서쪽에서, 어떤 사람은 시님 땅에서 오리라.” 최선교사는 이 시님이 현대의 중국을 의미하는 단어이고, 하나님이 사람들을 시님 땅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은다고 했으니 중국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 이 복음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가져다줄 거라는 주장이다.(263) 문맥과는 상관없이 자기의 잘못된 신학을 성경에 집어넣어서 해석하는 방법이다.

이 이사야서 말씀을 잘 살펴보라. 여기에 어디 서진의 개념이 있는가? “어떤 사람은 먼 곳에서, 어떤 사람은 북쪽과 서쪽에서, 어떤 사람은 시님 땅에서” 온다고 했으니, 간단하게 말하면 사람들이 사방에서 온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시님이란 말만 똑 떼어서 중국이 예루살렘의 동쪽에 있으니 이것이 서진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가? 이것이 어떻게 BTJ의 근거가 되는가? 더구나 여기에 나오는 시님이 중국이냐 아니냐는 아직 학자들 간에 논란이 되는 사항이다. 일반적으로는 시님이 근동지역의 어느 한 곳으로만 알려져 있다. 일부 소수의 학자들이 이 지역이 중국을 뜻한다고 주장하지만 충분한 근거는 없다. 그래서 여기에서 시님이 언급된 것은,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지역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돌아올 거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BTJ의 개념이 단순히 최바울 개인의 잘못된 성서해석으로만 그치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이것이 전체 인터콥의 선교방향을 결정하고 그것에 따른 행동강령까지 결정하게 되는 것이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최선교사는 중국이 예루살렘으로 BTJ운동을 일으킬 때 “중국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는 전략적 관문도시를 공략하는 영적 특공대 사역”을 한국교회가 특히 인터콥이 감당해야 한다고 믿고, 이런 믿음 하에 “우리 인터콥선교회는 벌써 지난 30년 동안 중국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지역에서 왕의 대로를 구축하는 사역을 해오고 있다”고 선언하는데 진짜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298)

따라서 최근에 최선교사가 미주교계의 비판에 대해 BTJ는 이슬람권 선교를 독력하기 위한 구호에 불과하다는 조의 변명을 늘어놓았는데, BTJ는 그 정도 레벨의 개념이 아니다. 이것은 인터콥의 중심방향이고 최선교사의 선교신학의 근본인 것이다. 인터콥은 이 BTJ를 성취하기 위한 “영적 특공대”인 것이다. 일반 군대가 하지 못하는 것을 앞서 나가서 해내는 것이 인터콥인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공격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런 전투적인 눈으로 보게 되니, 이 전투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는 사람은 좋게 말해서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고, 나쁘게 말하면 말만 잘하는 바리새인이 되고, 더 나쁘게 말하면 사탄의 조종을 받는 교회내의 반기독교 세력이 되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성서해석에 기초한 “영적 특공대” 의식은 2004년도 8월에 2500여명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대규모 기도집회를 갖게 되는 배경이 된다. 왜 인터콥이 이런 일을 감행해야 했을까? 최선교사의 설명은 이렇다.

2001년의 9.11사태가 일어났을 때 이것은 단순히 테러리스트의 공격이 아니라 아브라함 이후에 계속 증폭되어 온 이슬람과 기독교의 갈등이 폭발한 사건으로 말세의 중요한 징조라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제 세계는 양쪽으로 분리되어 대결구도가 되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기도뿐이었다는 것이다.(124) 이슬람의 영이 지배하고 있는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가서 그곳에서 기도집회를 하고 그 다음 날 팔레스타인에 가서 그곳에서 기도집회를 함으로 악한 영을 제압해야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땅밟기 사상과 BTJ사상이 합쳐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악한 영이 제압당해야 그곳에도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고, 이렇게 되면 곧 바로 예수님의 재림으로 종말이 온다는 것이다. 결국 인터콥이 강행하는 모든 대규모 기도집회는 BTJ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BTJ운동은 최선교사의 잘못된 성서해석에 기초한 것이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그밖에 여러 군데서 최선교사의 잘못된 성서해석의 예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한 가지만 설명하면 이렇다. 눅 19:42; 마 23:37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앞에 두고 우시면서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다면 좋을 뻔하였거니와...”라고 말씀하시는데, 최선교사는 이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예수님이 여기서 예루살렘과 성전에 닥칠 임박한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세의 사건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어떤 말세의 사건? 아브라함의 후예들, 즉 이슬람과 유대교와 기독교가 치열한 대립을 하는 것, 특히 이슬람과 기독교의 전쟁을 예언하는 것으로 9.11에서 절정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 9.11사건이 마지막 시대의 징조이기 때문에 얼마 안 있어 세상이 종말을 맞이할 것이고, 이 종말이 오기 전에 빨리 BTJ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미 성경에 예언된 말씀이고, 그래서 인터콥은 이걸 해야 한다는 것이다.(129) 이런 식의 성서해석은 아주 위험하다. 이단들이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이 이것이다.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그것을 기초로 그리고 임박한 종말사상을 여기에 가미해서 어떤 행동강령을 만들고 사람들을 그쪽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4. 이원론, 흑백논리, 안티의 신학

최선교사의 신학은 철저한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다. 이 세상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선과 악, 혹은 하나님과 사탄이 대결하는 장소가 되고, 이 관계는 절대 해소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에덴의 사건과 이후의 일관된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 분명히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원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원수인 사단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세계 영적도해, 44) 플라톤 철학에서는 이 이원론이 정신/혼과 물질/육의 대립으로 설명이 되고 이런 대립은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지속된다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최선교사의 이원론에서도 처음부터 두 가지 원리인 하나님과 사탄의 대립이 상정되기 때문에,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이 대립관계를 절대 벗어날 수 없고, 이런 상태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하나님 편에 서서 사탄을 대적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고 인간은 사탄을 대적하는 역할에서만 존재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최선교사의 이론에 의하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나무 뒤로 숨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누가 벗은 것을 알려줬느냐고 한 것은 선악과를 따먹게 한 배후인 사탄의 이름을 대라는 의미인 것이다. 보통 우리가 이 구절을 이해할 때는 아담에게 책임을 묻는 말, 혹은 아담이 당장에라도 회개하고 나오라는 하나님의 애정 어린 요구로 해석하는데, 최선교사는 이 구절을 배후인 사탄의 이름을 대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또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이 가인보고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물은 것은 하나님이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가인이 아벨을 죽이게끔 한 배후를 대라는 의미라는 것이다.(37)

이렇게 보면 아담이나 가인이 죄를 지었을 때 궁극적인 책임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탄에게 있는 것이다. “제일 먼저 사단은 가인에게 살인을 시킵니다.”(53) 아담과 가인이 자신의 자유의지로써 죄를 선택한 것이어서 그들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배후에서 조종하는 사탄에게 죄의 책임이 돌아가게 하는 사상구조이다. 즉 이런 정신세계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사탄만 있지 사람은 없는 구조인 것이다. 이원론의 여러 가지 문제들 중 이것이 이원론의 가장 큰 맹점이 되는데,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함으로써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는 이론인 것이다.

이렇게 성경과 세계역사를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이라는 이원론적 시각에서 보는 최선교사는 자연히 흑백논리를 갖게 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적군 아니면 아군, 하나님의 도구 아니면 사탄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흑백논리는 목표를 향해 일을 추진시키는 강력한 힘이 되지만,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은 논리이다.

함께 가야할 사람들, 특히 동료 선교사들을 적으로 만드는, 절대 장수할 수 없는 논리구조인 것이다. 그래서 최선교사는 이런 흑백논리의 시각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을 모조리 상대주의자 혹은 가치중립주의자로 몰아세우고, 확실히 자신의 노선에 동조하며 공격적으로 선교를 하든지 아니면 물러서라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크게 보면 최선교사의 세계관과 선교관은 선과 악의 대립,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이라는 이원론과 그 둘 중에 하나를 확실히 선택하라는 흑백논리의 지배를 받아서, 그토록 전투적이고 공격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선교사의 이원론적 신앙과 흑백논리는 불건전한 안티(anti)의 신학을 만들어낸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무엇을 긍정적으로 증명하고 추구하는데서 찾지 않고 무엇을 부정하고 대적하는데서 찾는 아주 불건전한 신학이다. 그의 글을 읽어보면 사방에서 안티의 모티브를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창조를 설명하면서 최선교사는 아담의 존재목적이 사탄을 대적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전형적인 안티의 신학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그 형상을 가지고 에덴동산을 잘 다스리도록 아담을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지, 어디 사탄에 대적하는 졸(卒)로서 사람을 창조했다고 되어 있는가?

또한 그의 신학은 반사회적이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성경에 나오는 적그리스도는 경제권력을 의미하고, 계시록13장에 나오는 짐승의 표는 현대의 통신과 경제시스템을 의미하고, 계시록 17장의 음녀는 자본주의 문명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언제나 사탄이 있다.

“세계화는 기술과 통신 수단이 발달하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하나의 현상이 아니라 그 배후에 추진세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화의 배후에는 분명한 비전과 전략을 가지고 추진하는 세력이 있습니다.”(153)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이에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이런 시스템이 아직 장악하지 못한 곳 그래서 그런 시스템에 저항할 수 있는 “변방”으로 가서, 반자본주의, 반자유주의, 반사회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의 의미인 것이다.(74)

이런 이해 하에 그는 사회의 중심부로 들어가 각 사회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독전문인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교회지도자들과 JAMA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을 비난한다. “문명의 중심에 가서 출세해서 세상을 바꾸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문명의 중심에서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문명의 중심은 강력하고 견고한 시스템이 작동하기 때문에 거기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88) “지금도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한인 기독교사회 전국 유학생집회와 미주 한인 엘리트 장로들이 주도하는 학생신앙운동에서 이러한 성공주의 및 엘리트주의는 어설프면서 유치하게 그러나 매우 레토릭한 형태로 계속되고 있습니다.”(246)

이런 반사회적인 태도 때문에 인터콥에 깊이 관여하는 사람들이 일반 사회나 교회에 잘 적응을 하지 못하고 선교지에 있는 다른 선교사들과도 교류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문명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그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초대교회 이후 기독교가 급성장하게 된 이유가 당시 중세의 문화를 기독교가 장악을 했기 때문이란 것을 모르는가? 자신의 노선만 옳다고 하는 아주 독선적인 태도이고, 그것도 잘못된 신학과 역사의식에 기초하여 정통신학을 비판하는 위험한 시도이다.

5. 아프칸 피랍사건(2007)

최선교사는 그의 책 상당부분을 아프가니스탄 피랍사건을 해명하고 자신의 공격적인 선교정책을 변호하는데 할애한다. (그 만큼 이 사건이 인터콥에 치명적이었다는 말이 된다.) 그는 [시대의 표적]에서 아프가니스탄 피랍사건을 이유로 자신과 인터콥을 비판하는 것과 이슬람국가에서 선교하지 말라는 것을 동일시하면서 사건을 왜곡한다. 사회 언론이 “왜 타종교 이슬람국가에서 기독교인들이 선교하느냐?”라며 인터콥을 마치 종교갈등을 일으키고 인류공동체의 안정과 세계평화를 저해하는 사람들로 규정하는데, 이는 순전히 적그리스도가 펴는 공작, 더 정확히 말하면 친북좌파가 이슬람세력과 결탁하여 교회를 공격하는 작전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적그리스도가 지향하는 것은 세계제국의 통치 시스템이요 가치중립적인 중앙통치체제이기 때문에, 기독교가 이런 식으로 종교 간의 충돌을 일으켜서 평화를 깨면 안 되는 것이다.(144; 왕의대로, 74)

최선교사가 여기서 그쳤다면 필자도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최선교사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한국교회들에 대해서도 왜 탈레반을 비난하지 않고 자기들을 비난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며, 더 나아가 한국교회가 인터콥의 공격적인 선교를 비판하는 것은 한국교회가 이미 철저히 생명력을 잃어버려서 억압적인 시스템화 되어버렸고, 영적 전쟁에 무지한 고로 세상 논리에 놀아났기 때문이라고 규정한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논리로 함께 비난한 것입니다.” “사단의 공격에 대해 하나님의 세계경영에 깨어있지 않는 일부 교회지도자들이 안티기독교 좌파들이 전개하는 사이버 작전에 부화뇌동함으로 낳은 결과입니다.”(왕의대로, 74)

우리는 여기에서 최선교사가 피랍사건을 고의로 왜곡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한국교회에서 누가 이슬람권 선교를 부정하는 사람이 있는가? 당연히 우리는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고 믿는다. 단 한국교회에서 문제 삼는 것은 기독교인이 이슬람국가에 가서 선교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타문화나 현지 교회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공격적으로 선교를 하는 인터콥의 거만한 선교방식인 것이다. 과연 그런 식으로 단기적으로 들어가서 치고 빠지는 식의 선교가 진짜 이슬람권 선교에 도움이 될까? 그렇게까지 많은 물의를 일으키면서 계속 이슬람국가에서 대규모 기도집회를 열어야 할까? 이슬람국가에 들어가 오랫동안 머물며 선교하고 있는 선교사들은 생각하지 않고 (심지어 그들을 목숨이나 구걸하는 비겁한 선교사로 비하하면서) 자기들이 공격적으로 선교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아주 독선적인 모습이다. 선교지에서는 다른 선교기관들과 선교사들과 협력해야 한다는 기본도 지키지 않는 횡포인 것이다.

6. 기타 역사해석에 대한 오류

최선교사의 책들을 읽으면서 발견한 몇 가지 역사해석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최선교사는 초대교회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영적 세계도해] 49쪽에서 그는 “초대교회 성도들은 체계화된 지식과 신학은 없었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루어 갔습니다”라고 기술하는데 과연 그럴까?

최선교사는 초대교회의 문헌들을 읽어보고 이런 주장을 펴는 것일까? 그것이 아니더라도 신약성서만 보더라도 그곳에 체계화된 신학이 없다는 말인가? 누가의 신학이 있고, 바울의 신학이 있고, 야고보의 신학이 있는데... 현대교회의 문제는 최선교사의 주장대로 신학적 체계가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영성이 뒷받침되지 않은 신학체계 때문인 것이다. “생명의 말씀은 뒤로 하고 모호한 종교적, 신학적 용어만이 난무하다 보니 신자들은 신학적, 지적 체계와 교회 운영의 시스템 속에서 영성을 잃어버리고 나약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주장을 부각시키려고 현대의 교회를 너무 지나치게 무시하는 어법이다. 과연 현대의 교회가 “생명의 말씀은 뒤로 하고” 신학적 체계와 조직만을 내세우는 것일까? 충분히 일리가 있지만 사실에는 맞지 않는다.

초대교회에 대한 환상의 연장으로 94쪽에서는 사도바울에 대해 “변방에서 역사를 이룬 사람” “세상적으로 별로 훌륭하지 못한 사람” “약간 똑똑하고 다혈질인 평범한 한 청년”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정반대이다.

바울은 당시 수사학의 중심지 중 하나인 다소 출신의 사람으로 수사학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바울 서신을 읽어보면 수사학이 상당히 많이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당시에 글을 읽는다는 것은 적어도 중류층 이상이 된다는 말이고, 거기에 수사학에 능통하다는 말은 귀족급에 해당한다는 말이다. 바울은 세상적으로도 아주 훌륭한 사람이고 능력이 있었던 사람이다.

201쪽에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혁명의 제 3계급이 노동자였다고 하는데 당시 노동자는 아무 권리도 없었다. 프랑스 혁명의 1계급은 성직자, 2계급은 귀족, 3계급은 신흥 부르주아와 (요즘말로) 전문직 종사자들이었다. 또 211쪽에 문명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갈 때 음녀가 그 지역을 지배하는 여신의 형태로 갈아타는 것을 설명하면서, 종교개혁(칼빈의 자본주의 정신), 그 다음에 프랑스 혁명의 자유의 여신, 그 다음에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는데, 최선교사가 역사의 기본 순서도 모르고 설명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프랑스 혁명은 1789년에 일어났고 엘리자베스 1세는 1558-1603 사이에 왕으로 재임한 인물이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16세기 말이 아닌 18세기 말 정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같다.

[왕의 대로] 201쪽에는 영국 성공회가 엘리자베스 1세 때 천주교에서 분리하여 독립했다고 설명한다. 그것도 “성경적인 교회와 참다운 신앙생활을 꿈꾸며 종교분리주의 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설명하는데 역사에 전혀 맞지 않는다. 영국 성공회는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헨리 8세 때 결혼/이혼문제로 가톨릭에서 분리되게 되는데, 헨리의 관심은 “교황 없는 영국의 가톨릭교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학과 예전은 거의 기존 가톨릭의 형태를 고수하였다.

그 다음 왕인 에드워드 때 본격적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되는데 몇 년 못 살고 죽고, 그 다음은 가톨릭 신봉자인 메리로 넘어가서 종교개혁에 가담한 사람들이 이때 많이 처형을 당하지만 메리도 오래 못 살고 죽는다. 그 다음이 엘리자베스 1세인데 이 사람의 정책은 중도정책(via media)이다. 가톨릭과 개신교를 통합한 중도노선을 걷는 것이었다. 따라서 “성경적인 교회와 참다운 신앙생활”은 엘리자베스와는 거리가 멀다. 한편 202쪽에서는 “영국교회는 루터의 신학적 기조에 따라 영국 내 교회를 통일시키는 정책을 강화”하였다고 기록하는데, 역시 역사와 거리가 먼 소설이다. 영국교회의 통일은 루터의 이론 때문이 아니라 엘리자베스와 후대 왕들의 정치적 선택인 중도노선에 의한 것이다.

7. 결론

최바울과 인터콥은 평신도에 의한 선교를 제 궤도에 올려놓은 공적이 있다. 교회의 가식에 대한 지적, 교회의 세속화와 제도화에 대한 비판은 현대 교회가 겸허하게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신학의 근간을 이루는 중심요소들이 성서와 교회의 경험에 위배되고, 최바울과 인터콥이 한국교회에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으로 다가오게 된 것이 안타깝다.

잘못된 성서해석에 기초한 BTJ 선교운동, 이원론에 기초한 흑백논리, 타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전투적인 선교방식, 주술적인 땅 밟기, 다른 선교단체들을 무시하고 강행하는 독선적인 선교 등 본인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런 신학적 토대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선교를 방해하고 동료 선교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바라기는 최바울 대표와 인터콥이 위에서 지적한 사항들에서 오류를 수정하고 성서에 기초한 하나님의 선교에 더욱 매진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무엇이 성서적이고 무엇이 비성서적인 것인지를 잘 숙지하고 주님의 지상명령인 하나님의 선교에 적극 동참하기를 바란다.

홍삼열
-서울대학교 졸업
-감리교 신학 대학원(M.Th)
-듀크 신학 대학교(M.T.S.)
-클레어몬트 신학 대학원(Ph.D.)
-현재 산타클라라 연합감리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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