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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체통
작성자
eroica
작성일
2009-03-30
조회
2027

우체통

도종환


그들이 사랑을 시작한 강가에는
키가 작은 빠알간 우체통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섶다리를 건너갔다 건너오며 사랑이 익어가고
물안개 피어오르는 하늘을 넘어 남자의 편지가 가고
저녁 물소리로 잠든 창문을 두드리는 여자의 답장이
밤마다 강을 건너가는 것을 우체통은 알고 있었습니다

두껍게 쌓인 눈은 오래도록 녹지 않던 어느 해 겨울
두 사람이 강가의 우체통 근처에서 만나
깊고 맑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다
아주 아주 따뜻한 입맞춤을 나누는 것을
우체통은 저녁노을과 함께 바라보았습니다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맑은 눈빛이 점점
소년처럼 변해가는 남자의 얼굴과 소녀 같은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하는 여자의 가슴에
남자가 달아주는 반짝이는 강 햇살 한 무더기를
우체통도 가슴 뜨겁게 바라보았습니다

둘은 우체통말고는 아무도 모르게 몰래 사랑하였습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랑이 그렇게 비밀스럽게 시작하는 거라서
더욱 가슴 두근거리게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런 날의 사랑이 가장 맑고 지순한 사람을 만드는 걸 알았습니다
사랑이 귀한 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착하고 너그럽게 만들기 때문이란 걸 우체통은
두 사람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주는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체통은 가슴이 늘 벅차올랐습니다

두 사람이 돌아가고 난 뒤에도 우체통은
그들이 줄 수 없는 걸 주며 견딜 수 없는 걸 견디게 하는
사랑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던 목소리를
오래도록 잊지 않았습니다

이별보다는 그리움에 젖은 편지가 다시 또
남자의 창을 향해 새 떼처럼 날아가고
산 그림자를 안은 강물처럼 여자의 마음을 받아들이며
투명해진 남자가 믿음과 뜨거움이 담긴 목소리를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또박또박 편지지에 심어가는
아름다운 사랑이 해와 달처럼 이어지길 빌었습니다

제발 가슴을 철렁이게 하는 편지가 우체통
바닥 깊은 곳에 던져지는 일이 없기를
한 사람의 편지만이 끝없이 쌓이고 또 쌓이는
일이 없기를 우체통은 강물에 빌고 또 빌었습니다


Across the Universe - Goran Sollscher

해바라기   [2009-03-30]
참 예쁜 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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